2007년 2월 21일 수요일

형.

나는 맏이라 형이 없다.
어릴 때부터 형이나 누나가 있는 친구들은 무조건 부러웠다. 내 능력 밖의 어떤 일이라도 형이 있으면 다 해결해줄 것 같이 느껴지니까...
아무튼 형이 있는 친구들이 형이랑 뭔가를 하거나 형의 도움을 받거나(특히 싸울 때) 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동생들에게 내가 그런 "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대로 챙겨 준 적도 없고 동생이 동네 친구들과 싸울 때 무조건적인 편을 들어 준 기억도 없는 것 같다. 그냥 나름의 "객관적" 입장만을 보였던 것 같다. 허허허... 이게 무슨 형이라고...

아무튼 내게 없는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서 그런지 형들과 친해지는 경우가 참 많았다.
대학을 다닐 때도, 대학원을 다닐 때도, 회사를 다닐 때도 그런 것 같다.
늘 내 주변엔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PDA를 만든다고 정신 못차리고 일하다가 말아 먹고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나의 게으름과, 꽉 막힘과, 호전적 대화법을 넘어 날 챙겨주고 이끌어 주던 형이 있었다.
그 이전까지 늘 회의는 사장과의 싸움이고 개발은 라면만 먹으며 하던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게 "정상적"인 사회와 조직, 회사에서 일하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내가 잘 견디지 못하고 그 회사를 뛰쳐 나왔다. 지금보다 아주 오래 전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도 생각이나 행동이 너무나 어렸던 것 같다.
그렇게 그 회사를 뛰쳐나와 한 일이 전자 액자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 회사를 나온 후에 나름 바쁘다는 핑계로, 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연락을 못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몇 년을 정신없이 살며 가끔 그 형을 생각했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사오면서 그 형을 다시 만나게 됐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내가 몇 년 동안 연락도 없이 살았음에도 그냥 담배 한 개피에 한 번 웃음으로 다 안아 주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부러워하던 "형"들이 그 동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몇 년 동안 마음 속에 큰 빚으로 남았던 형에 대한 기억을 다시 모두 꺼낼 수 있게 형은 그냥 날 이해해주고 웃어주었다. 바쁘거나 일이 힘들어도 항상 웃어 주었다. 참 고맙다.

아직도 형은 늘 내게 여유와, 이해와, 휴식이다.

이제 나도 형이 있다. 내가 부러워했던 그 친구들처럼...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서울 구로 구로 디지털 단지 코오롱 사이언스 밸리 2차 3층 정원, Sigma SD10, Sigma 24-70mm 2.8 EX DG Macro, SPP 2.1, Picasa 2.6 세피아 변환 후 필름 효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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