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7일 화요일

좋은 것을 좋은 그대로 놔두기.

대학 시절부터 무지하게 많이 간 절이 월정사이다.
다른 이유는 별로 없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가 짝사랑하던 사람이 이 절의 풍경을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나야 부모님 따라서 전국을 여행했었기 때문에 더 좋은 풍경을 찾으라면 찾을 수도 있었는데 내가 짝사랑하던 사람이 좋다고 하니 그냥 덩달아 좋아졌다(물론 짝사랑하던 사람과 월정사에 가기 전에도 난 월정사에 자주 갔었다).
그렇게 별 이유없이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인사한다”는 식으로 좋아하다보니 어느 덧 내가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물론 이제는 월정사를 다른 눈으로 볼 기회를 줬던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친구로서 가끔 연락을 할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애인으로서 보다는 친구로서 더 소중한 녀석이다. 인연은 따로 있다. 정말...).

월정사에 처음 가는 사람과 함께 월정사를 찾아가면 처음 하는 일이 전나무 숲 산책이다. 월정사의 일주문에서 본사가 있는 곳까지 숲이 아주 기분 좋을 정도로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를 걷고 있으면 정말 속세의 고민이 다 풀릴 것 같으니 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가도 이 산책은 포기를 못한다. 포기한 적도 사실 없고.
숲을 함께 걷는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차분하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준다. 도시에서 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도 참 좋은데 월정사 전나무 숲 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것은 더 좋다.
특히 한 여름에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 드문 내려오는 빛을 보며 걷는 기분이란... 정말...

월정사의 사천왕이 계신 곳에 다다르면 바로 앞으로 흐르는, 약간 큰 내를 보게 되는데 4계절 늘 맑은 물이 넘치게 흐른다. 졸졸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는 걸 느끼는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오래 전에 학교 친구들과 돈 한푼 가지지 않고 무작정 찾아 갔을 때 그 물에 비치던 달을 본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정말 배가 고파 그 달이 빵이나 밥 사발 쯤으로 보였던 것 같은데... 하하하...
겨울에 눈이 오면 개울엔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게 된다. 숲에 내리는 눈이 다 그렇듯이 눈 위에 여기 저기 놓인 낙엽 자국 없이 그냥 한가지 하얀 색으로 눈을 볼 수 있는 곳이 이 개울이다. 운동장처럼 시원하게 넓은 곳에 깨끗하게 눈이 깔린 것을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주변의 숲에서 동떨어져 깔끔하게 한켜 “깔린” 개울 위의 눈을 보는 것도 괜찮다. 숲에서 보면 약간은 색다른 맛이다.

월정사는 워낙 오래되고 규모도 있고 역사도 오래된 절이라 이렇게 저렇게 건물들이 많은 편이다. 내가 가진 월정사에 대한 첫 기억과 비교하여도 여기 저기 새 건물들이 많아졌다.
돈에 여유가 있어 좋은 건물을 예쁘게 만들어 내는 것도 좋은 일이라 너무 복잡하거나 “거대한” 건물만 아니라면 그냥 저냥 참고 보는 편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월정사의 절 집들은 작진 않아도 너무 커서 압도적이지는 않다. 혼자 가진 바램이라면 주변 숲과 산을 압도하는 건물은 월정사에 들어서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참 슬플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일을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일도 월정사엔 있다.
어느 날 월정사에 갔더니 건물과 탑에 조명 시절을 새로 했었다. 밤에 빛이 나는 건물과 탑을 보는 것도 아주 나쁜 일은 아니라서 그냥 참고 있었다.
사실 밤엔 밤 답게 별 빛을 어깨 뒤로 보여주는 기와 지붕을 보는 게 더 좋다. 아주 까만 밤만 아니라면 건물의 실루엣이 밤 하늘의 별과 함께 너무나 좋은 풍경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나라 기와 지붕은 그 곡선 덕에 밤 하늘을 지나는 작은 구름과 그 사이의 별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참 잘 어울리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이 조명이 이상해졌다.
탑을 비추는 조명이 색이 들어간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의 생각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창의적” 발상이다.
생뚱맞고 촌스럽기 그지 없는 초록색 등등으로 바뀌는(그렇다! 색이 바뀌기도 한다!) 탑을 보고 있으면 내가 서울에 있는 건지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전국의 절마다 저런 일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른 절들엔 내가 밤에 가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밤에 가볼만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절이 없다.
제발 저 색과 그 색깔 바뀜만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냥 좋았던 것들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젊은 시절 “좋았다”고 느끼던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나 내가 나이 들어서도 그 좋음을 느꼈던 나이를 즐기고 있을 내 후손에게 말해줄 수 있게, 그리고 다시 그 “좋음”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말이다.


(2007년 3월 31일 토요일, 오대산 월정사, Sigma SD10, Sigma 24-70mm 2.8 EX DG Macro, SPP 2.1 for Mac OS)
(2007년 3월 31일 토요일, 오대산 월정사, Sigma SD10, Sigma 24-70mm 2.8 EX DG Macro, SPP 2.1 for Mac OS)

댓글 4개:

익명 :

맙소사! 탑한테 뭔짓을...-_-" 직접 가서 보기가 두려워지네요. 흠~

Unknown :

낮에 가시면 괜찮아요. ^^

익명 :

아! 그런 방법이...ㅎㅎ 생각해보니 저 조명 보기가 더 힘들수도 있겠군여.

Unknown :

조금만(?) 늦게 가시면 보실 수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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